권태신(74)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민관(民官)에서 두루 활동한 경제인입니다. 서울대 상대 졸업후 공군장교로 4년 반 복무한 그는 1976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4개 정부 연속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그는 재정경제부 차관, 주(駐)OECD대사, 국무총리실 실장(장관급)으로 봉직했습니다.
◇‘최악 존폐 위기’ 전경련 6년 이끌어
공직 퇴임 후 2014년 3월부터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을 맡은 그는 2017년 2월부터는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공무원 출신이 민간의 야전(野戰) 사령관으로 10년 가까이 활약한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권 부회장은 특히 박근혜 정부 말기 ‘국정농단 사건’으로 최악의 존폐(存廢) 위기에 몰린 전경련을 이끌며 고군분투(孤軍奮鬪)했습니다. 2016년 당시 639개였던 전경련 회원사는 현재 420여개, 250여명이던 직원은 100명 아래로 줄었습니다. 그는 이달 말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함께 퇴임할 예정입니다. 기자는 이달 초 권 부회장을 만났습니다.
- 지금 심정은?
“2017년 2월 13일, 허창수 전경련 회장으로부터 상근부회장직 요청을 받고 수락한 뒤, 두어달 간 수면제를 먹으며 불면(不眠)의 밤을 보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경련의 회비 수입이 급감하고 혁신안 마련, 구조조정 등으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그때 전경련을 떠난 삼성·현대차·LG 등 4대 그룹 복귀 같은 완전 정상화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이 있다.”
- 가장 힘들거나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라면?
“1961년 창립한 전경련은 대한민국의 국가대표급 민간 경제단체이다. 그런 곳이 ‘정경유착의 적폐 본산’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위상이 추락하는 게 가장 아프고 힘들었다. 지난 6년간 노력으로 전경련의 역할과 필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고, 내부 조직이 안정되고 대외 기능을 회복한 게 큰 보람이다.”
- 전경련이 ‘유령 경제단체’ 취급을 받았던 문재인 정부 5년을 평가한다면?
“한 마디로 문 정부는 노조(勞組)가 주인(主人)인 나라, 즉 노조 공화국을 만들었다. 출범 직후부터 친(親)노동 정부를 표방하며, 노조가 주장하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도입했다. 반대로 파업시 직장 점거 금지, 비종사자 출입제한 같은 기업들의 방어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노조에게 유리했던 노사관련 법·제도가 더 노조 친화적으로 굳어져 한국 경제는 한층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민노총 조합원 수, 文 정권 4년 만에 75% 늘어”
그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노조는 문재인 정부에서 재벌개혁, 사드 배치 반대, 적폐 공공기관장 명단 발표 같은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전위대(前衛隊)이자, 문 정권과의 운명 공동체였다. 정권의 비호(庇護)에 힘입어 민주노총은 2016년 65만명이던 조합원을 2020년에 113만명으로 75% 정도 늘렸다. 21대 국회에선 노동계 출신 국회의원 21명이 들어와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노조에겐 천국, 기업에겐 지옥’ 같은 곳이 됐다.”
권 부회장은 “노조의 파업 및 불법 행위를 문 정부가 눈감아 주는 바람에 2017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발생한 경제적 손실액만 최소 6조 5000억원이 넘는다”며 “2022년 초 택배노조의 파업을 64일이나 방치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 ‘노조 공화국’이 되면 왜 나쁜가?
“노조 공화국은 남미에서 유행한 포퓰리즘(populism·대중 인기영합주의)의 완성판으로써, 한국 경제의 몰락과 공산주의화로 직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땀흘려 일하기 보다 편하게 놀고 싶어한다. 노조의 요구대로라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최저임금을 계속 올리고 근로시간은 줄이고, 세금을 들여 편한 일자리를 만드는 대신, 기업에 많은 세금을 거두고 옥죄야 한다. 문 정부 5년간 약 3000억달러의 투자가 해외로 빠져 나가 좋은 일자리도 사라졌다. 이게 근로자에게 진정 도움되는 일인가?”
그는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에는 우리나라 국가부채가 2200조원에 육박해 역사상 처음 ‘나라 빚 2000조원 시대’가열렸다. 문 정부 5년은 ‘국가경쟁력’ ‘생산성’ ‘기업환경 개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아예 사라진 한국 경제의 암흑기였다”고 했습니다.
◇“사유재산 존중이 자유시장 경제의 근간”
- 이런 분위기에는 ‘경제 민주화’ 주장도 한몫하지 않았나?
“그런 측면이 있다. 우파와 중도진영 정치인·학자들이 얘기하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기업들의 손발을 묶고 나눠먹자는 것이다. 좌파의 억강부약(抑强扶弱·강자는 억누르고, 약자는 부추겨 지원한다) 논리와 동일하다. 가난하거나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의 표(票)를 얻으려는 발상으로 사회주의와 일맥상통한다.”
- 건강한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뿌리 내리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가장 기본이고 절실한 것은 ‘사적(私的) 재산의 존중’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부자’를 적대시하며, 부자들이 사회를 위해 무조건 더 많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여긴다. 주요국들보다 훨씬 높은 소득세·법인세율, 과도한 종부세 등이 이런 논리에서 만들어졌다.”
권 부회장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세기에 세계 GDP의 30%를 차지한 청(淸)나라가 아닌, 왜 작은 섬나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영국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인정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의 원동력이 돼 산업혁명을 추동했다. 영국인들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를 시작으로 700년 넘게 자유와 완벽한 사유재산 보호를 얻으려 목숨 건 싸움을 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도 사유재산 인정과 자유(自由)의 토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최근 수 년간 과도한 세금, 부동산 시장 규제 등 자유를 침해하는 정책이 속출한 것은 자유 침해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발·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라며 “자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져야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정부 정책과 입법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파 활동 참여·지원 겁내는 시민·기업들”
- 그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 우파들은 비겁한 것 같다.
“공감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만 해도 매년 5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100달러씩 회비를 자발적으로 내고 있다. 전경련도 산하에 자유기업원을 두고 우파 철학·논리 전파에 나섰지만 기업들조차 나중에 보복을 겁내 후원을 꺼리더라. 이제라도 참여연대, 경실련 같은 단체를 만들어 돈도 내고, 청년 상대 강의도 하는 ‘행동하는 우파’가 나와야 한다.”
- 2022년 말 발간한 저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에서 ‘한국 경제에 남미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썼는데.
“20세기 초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세계 5대 경제 부국으로 나라 이름도 ‘은(銀)이 넘치는 땅’이라는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것은 무상복지 같은 포퓰리즘 때문이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가진 베네수엘라도 포퓰리즘으로 세계 최빈국이 됐다. 한국에서도 6년 전부터 대기업·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 국민들에게 나눠주자는 포퓰리즘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선 아무도 열심히 일 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5대 세계 경제 강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1958년부터 지금까지 22차례 IMF 구제 금융을 받은 ‘상습 부도 국가’로 추락했다. 1940년대부터 노조와 정치인들이 영합한 ‘노조 포퓰리즘’이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탓이다. 2019년 12월 도로를 점거한 아르헨티나 노조가 좌파 대통령 취임 축하 시위를 벌이는 모습/조선일보DB
20세기 초 5대 세계 경제 강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1958년부터 지금까지 22차례 IMF 구제 금융을 받은 ‘상습 부도 국가’로 추락했다. 1940년대부터 노조와 정치인들이 영합한 ‘노조 포퓰리즘’이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탓이다. 2019년 12월 도로를 점거한 아르헨티나 노조가 좌파 대통령 취임 축하 시위를 벌이는 모습/조선일보DB
◇“IMF외환위기는 ‘정치의 경제 지배’ 때문”
- 우리나라도 아르헨티나처럼 몰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과 대외신인도를 보면 당장 그럴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2030년대부터는 0%대, 2050년 이후에는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인구 감소, 국가·민간 부채 급증을 보면, 경제 사정이 더 악화할 수 있다.”
그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국가정책을 운용하는 경제 관료들과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사탕 발린 이야기보다 국가발전에 중장기적으로 도움되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전경련이나 한국경제연구원 같은 경제단체, 연구기관, 언론사 등이 쉽고 정확하게 정책의 영향을 분석하고 널리 알리려 노력해야 한다.”
-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경제부총리 비서실장이었는데, 외환위기에서 얻을 교훈이라면?
“외환위기는 ‘정치가 경제를 지배’한 결과 발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선진국 진입’이란 치적을 남기려고 OECD 가입을 서두르고 달러당 800원으로 환율을 억지관리한 게 대표적이다. 이로인해 1993~97년 경상수지 적자가 486억달러로 불어나 정부 통계작성후 총적자의 80%에 달했다. 경제 실력을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정책이 누적되다가 폭발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다른 정부들도 대동소이했다. IMF로부터 노동시장 개혁을 주문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만 만들었을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후 노동개혁은 모든 정권이 외면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 노조는 기업과 정부 모두 무서워하는 강력한 정치적 이권단체가 됐다.”
그는 “정치가 경제를 가장 많이 압도한 시기는 문재인 정부 때이다. 소득주도성장,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기업규제3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꼽기 어려울 정도다. 미래 세대가 희망을 가지려면 더 이상 정치 논리가 경제를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반도체 등 전략 산업 확실하게 키워야”
- 윤석열 대통령에게 경제 살리기와 관련해 충언(忠言)한다면?
“국민들에게 인기없는 정책이라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意志)를 갖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당장은 손해여도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은 또 각국 정부가 앞장서서 산업을 키우는 시대이다. 세계 경제 전쟁에서 낙오 안 되려면 반도체 등 특정 전략 산업을 최소한 경쟁국 수준으로 확실하게 챙기며 키워야 한다.”
- 아직도 한국 지도층·지식인들 사이에 중국 눈치를 보고 굴종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은 전형적으로 약한 나라에는 강하고, 강한 나라에는 약한 나라이다. 중국이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국력을 강하게 키우는 게 기본이다. 동시에 단기적인 피해와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우리가 주권국가로서 중국에 의연하게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 호주, 노르웨이, 일본, 싱가포르 등은 중국의 경제 보복에 원칙을 갖고 일관되게 맞섰고, 결국 중국이 먼저 꼬리를 내리고 항복했다.”
- 2023년 경제 상황이 힘든데 국민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한국은 6.25,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 숱한 위기를 이겨왔다. 지금 복합경제위기도 우리가 분열하지만 않는다면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야당이 ‘대기업 지원’이라며 반대하는 행태는 구(舊)시대적이다. 아울러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우리의 MZ세대가 잠재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기성 세대의 혁신 노력이 절실하다.”
그는 “무엇보다 수준 높은 정치, 즉 정치 선진화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기업이 역동적으로 뛰고,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겨야 MZ세대와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 그럴려면 정치가 달라지고, 후진적·당파적 사고(思考)에 머물고 있는 정치인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앞으로 퇴임 후 계획은?
“앞만 보며 일에 매진했는데, 당분간 쉬면서 한국 경제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지 고민해볼 생각이다.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등 익스트림 스포츠에 다시 한 번 도전해 재충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