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장 12절- 17절
함석헌 옹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글입니다.
“만 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글을 쓴 함석헌 옹은 자신은 여기서 말하는 그런 사람을 가졌기에 이 글을 쓴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을 가지셨습니까?
저는 가졌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신 함석헌옹이 자랑스러워하는 그분을 저도 알기 때문이고, 제가 믿는 그분과 동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하는 그분은 누구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친구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고 친히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어떤 친구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오늘은 우리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2절과 13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 친구가 아니고 자기 목숨을 버려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신 우리의 친구라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사랑받을 만한 친구도 아닌 정말 속 썩이는 우리들, 친구 될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놀라운 사랑을 가진 친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 친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그저 믿기만 하면 그분의 친구가 된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이면, 어떤 은혜를 입었으면, 내가 그분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대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질문하는 제가 심술궂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저 자신은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도저히 그럴 친구가 없다고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이 일이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사오니” 마태복음 26장 38절과 마가복음 14장 34절에 동일하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신 죽으신 예수님도 이 일로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마가복음 14장 36절, 누가복음 22장 42절에 공히 기록된 말씀을 보십시오.“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 원하나이다.” 정말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죽는 것은 가장 어렵고, 힘들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받을 염치도 없고,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베푸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독생자가 우리 대신 죽음으로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제일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 친구”이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이제는 종이라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종은 어떤 신분의 사람입니까? 종은 주인이 무엇을 시킬 때,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주인에게 설명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인은 종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친구는 어떤 사이입니까?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는 비밀 이야기까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친구라 인정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창세기 18장을 보십시오. 세 천사를 대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위에 지쳐 있는 세 천사에게 발 씻을 물을 주고, 떡을 먹게 하고, 송아지를 잡아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탄생을 예언해 줍니다. 그러나 그뿐 아닙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다.“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정성을 보시고 흡족하셔서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난 후,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을 이야기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까지도 소상히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 18장에서 22장으로 넘어갑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22장 2절 말씀입니다.“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니 100세에 겨우 얻은, 자기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아들을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번제물로 바치라니 말이 됩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정말 하나님 맞습니까? 아니 정신이 있으십니까?”라고 항의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2절 말씀이 끝나고 3절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청천 벽력같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망설임이 있었겠지만, 그 명령대로 행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삭과 하인을 데리고 3일 길을 가서 번제단에 이삭을 올려놓고 그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과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서 2장 23절 말씀을 보면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벗’이라 칭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믿음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같이 부족한 존재들조차,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친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심하고, 따르고, 믿는 예수님의 사랑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와 같은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격과 자질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했는가는 마태복음 11장19절과 누가복음 7장3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거룩하고 지식이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당시 잘 나가는 정치적인 실세들과 율법사들이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벌레보다도 싫어하는 “glutton” 즉 ‘음식을 게걸스럽게 폭식하는 절제하지 못하는 천박한 사람’과 “술주정뱅이” 그리고 ‘세리’와 같은 “the worst sort of sinners” 즉 ‘이가 갈리도록 저주스러운 악질류의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과 친구로 지낼 수 있으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와 같이 사람들을 신분과 겉모습과 그리고 현재의 모습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속에 감추어진 깨끗한 영혼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음을 아시고 그들을 신뢰하며 친구의 우정을 나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기회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인간을 우리의 가치관을 가지고 차별하거나 업신여긴다는 것은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은 죄인이면서 주님도 인격적으로 대한 사람들을 우리도 부족하면서 어찌 차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렇듯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인격적으로 대하신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다정한 친구”이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다정히 손 내미시고 친구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다정하신 예수님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같은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어떻게 친구가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성도 한 분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너무 버릇없이 함부로 말하고 예의 없이 대하는 것 아니어요?”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뜻밖의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는데 저는 형제님과 같은 사람이면서 어떻게 더 다정한 친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생각은 목사와 성도는 더욱 다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요한복음 13장 23절과 2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이까?”
유대 나라의 식사 풍경은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음식을 먹는 좀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의지하여 누었다고 말하고, 그가 그대로 누워서 예수님을 올려 다 보면서 “주여 누구오니이까?”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친하고 다정하다 하여도 제 가슴에 의지하여 식사를 하실 분이 있으신가요? 거기다가 그대로 의지한 상태에서 비스듬히 올려 다 보며 이야기를 하실 만큼 제가 여러분께 다정한 사람이라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체통 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통이 없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다정하신 분이십니까?
제자와 스승 사이가 이 정도이면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해야 가능할까요? 저도 저와 여러분들의 사이가 이토록 다정다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찬양의 교회가 그런 교회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아마 다른 교회의 성도님들은 부러워서 배가 아프고 위장약을 사서 잡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런 교회를 만들어 보십시다.
아주 신이 나는 교회, 교회에 오면 일주일의 짜증이 확 풀리고, 며칠만 보지 않아도 보고 싶은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가 된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정한 친구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주시되, 우리가 그 목숨을 주시고 바꿀만한 존재가 아님에도 기꺼이 내어 주신,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믿기만 해 달라고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기를 바라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던, 능력이 있건 없건,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던, 그리고 어떤 죄를 지은 사람들이건, 우리 속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다면 그분은 친구가 되어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감히 내가 목사인데……” 걸핏하면 갑질하는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인데 너희들이 감히……”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도리어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부처가 그랬습니까? 마호메트가 그랬습니까?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을 ‘친구’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그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어떤 모습이든 품에 안으시고, 다정스레 위로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다가가야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찾아가야 했다면 무슨 재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소개하셨습니다. 너무나 다정한 분임에도 우리가 너무 어렵고,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만 알기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안타까워, 이 시간 저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친구로서 신뢰하고 우정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를 “다정한 친구로서 따뜻하게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좋으신 친구이십니까?
힘이 드십니까? 그분에게 말씀하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억울한 일, 무시당한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신뢰해 주는 좋은 친구 예수님께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너를 친구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무 외롭고 슬프십니까? 그리고 불안하십니까? 예수님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예수님을 비스듬히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시오. “예수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너무 외롭거든요.”그분은 우리의 다정한 친구이십니다. 그분은 빙그레 웃으실 것입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만남은 오묘합니다. 그 만남이 우연처럼, 축복처럼 이뤄집니다. 길 위에 구르는 이파리 하나처럼, 혹은 희미한 휘파람 소리처럼 다가와 내 인생에 머물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만남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 속에 계십니다. 느껴지실 것입니다.
참 좋은 친구 예수!, 우리의 친구 예수! 여러분들에게 좋은 친구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조폭형제들을 가슴에 품은 목사 이야기 『하나님의 용사』. 안홍기 목사가 ‘글로벌 찬양의 교회’를 세우기까지 그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기술한 책이다. 깡패의 두목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조폭들의 목자가 된 안홍기 목사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를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