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잘 지냈니?” “예, 선생님은요?” “그래, 나도 잘 지냈다. 그새 많이 변했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시네요!”
30년도 넘은 세월이니 참으로 감격적인 해후였습니다. 제자라고 하지만 종희와의 나이차는 불과 4살, 종희도 50을 바라보는 중년입니다. 그 시절의 풋풋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모두 50 전후의 중년이 돼 있었습니다.
제가 종희를 처음 만난 건 1978년 봄입니다.그 해 봄 대학에 입학한 저는 고교 선배의 권유로 한 써클에 가입했는데, 그게 바로 야학 써클이었습니다.그 때만 해도 대도시 주변에는 야학이 더러 있었죠. 선배의 소개로 교사생활을 시작한 그 학교는 대구시 동구 효목동 언덕에 있던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
이 학교는 원래 인근에 있던 국군의무사령부 산하 군의학교 군인들이 대민봉사 차원에서 1965년 봄에 개교한 ‘효목실업학원’이 그 뿌리입니다. 동사무소 건물을 하나 얻어서 개교한 이 학원에서는 1975년까지 총 8회에 걸쳐 20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습니다. 입학생들은 주로 집안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불우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75년 말 군 당국의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 야학을 운영하지 못하게 되자 1976년부터 경북대 등 대구지역 대학생들이 이 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됐습니다. 저는 대학 입학 직후인 78년 봄부터 2년가량 이곳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종희도 그 해 봄에 신입생으로 입학해 저와 사제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학교 시설이라고 해야 슬레트 지붕의 교사(校舍) 두 동이 전부였습니다.서북쪽 언덕 위에 있던 본관에는 교무실과 그 옆에 3학년 교실이 붙어 있었고, 그 앞에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만한 운동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운동장 남쪽 편 건물에는 1학년, 2학년 교실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존 학교들에 비하자면 시설은 정말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향학열은 어느 학교 못지않게 높았고, 사제 간의 정도 도타웠습니다.
교장선생님 이하 교사는 전부 대구지역 대학생들로 구성됐었는데, 남녀 교사 합해 대략 20여 명이었습니다.저는 교사 기수로 치면 5기생인데, 이후로도 제법 이어졌다고 합니다.교사들 중에는 더러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도 하였는데요, 저는 제 장기과목(?)이랄 수 있는 한문 과목을 2년 내내 담당했었습니다.
교사들은 수업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잡무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반 학교에서는 이런 일을 대개 ‘소사(小使)’가 맡아 처리했는데요, 이곳에서는 그 역시 교사들의 몫이었습니다. 제 동기생 중에서는 박종구 선생이 이런 일을 주로 맡았었는데요, 그는 우스갯말로 자신과 같은 선생님들을 ‘소사과(小使科)’라고 불렀습니다.^^
잡무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 시험지 등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프린터만 있으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만 그 때는 ‘큰일’이었죠. 일단 과목별 문제지가 완성되면 글씨 잘 쓰는 교사가 철판에 대고 이를 긁은 후 (* 당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필경사라고 했는데, 저도 더러 동원됐었죠.)이를 등사판에 붙인 후 시커먼 등사 잉크가 묻은 롤러를 밀어 뽑아냈습니다. 그 시절엔 예외 없이 모두 이런 방법으로 시험 문제지를 만들었습니다.
교사들은 이밖에 진짜 ‘노가다’ 일도 더러 하곤 했었습니다. 학교가 낡은 건물(블록 건물)이다 보니 틈틈이 보수를 해야 했으며, 여름 방학 때면 학교에 나와 축대를 쌓거나 운동장 다지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사과’ 교사들은 유리창을 갈거나 겨울철 난로 시설도 곧잘 하곤 했었죠.그 시절 이 학교 교사들은 ‘전천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시설은 초라하고 규모는 작았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했습니다. 봄, 가을이면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소풍을 가기도 했고,가을엔 운동회, 연말엔 학예발표회, 또 웅변대회도 열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월요일 아침엔 교장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조회를 열었으며, 매월 교무회의를 열어 학교업무도 챙기고 교사들간에 친분도 다졌습니다. (* 그 덕분에 제 동기생 교사 가운데서 커플이 한 쌍 탄생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저와 이 학교와의 인연은 겨우 2년만에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80년 여름 군에 입대하면서 저는 교사직을 그만두었거든요. 그리고 복학해서는 학과 선배들의 요청으로 대구 이현공단에서 공단야학을 하였는데요, 이곳 학생들은 주로 ‘여공’들로, 인근 교회에서 방을 하나 빌려서 교실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서울로 올라오면서 공민학교와의 인연은 결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0여년 전 쯤 동기생 박종구 선생의 연락으로 교사모임에 한번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연락이 끊겼다가 이번에 종희와 연락이 닿은 것입니다. 이날 종희 말고도 동료교사 3명과 십 수년만에 해후를 했는데요,이곳 출신들(교사 및 졸업생)은 그동안 계속해서 모임을 지속해오고 있더군요. 사제간의 교류도 물론 여전하구요. 까까머리 제자들에게도 그 시절은 소중한 시간이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저에게도 흑백사진 같은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대학 초년생의 풋풋함이 있었고, 순수함이 넘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뭘 많이 알아서 누굴 가르쳤다기보다는 세상과 함께 하고자했던 마음이었던 게지요. 제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제자 김종희 군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당시 종희는 또래들에 비해 키가 작고 눈이 똥그란 까까머리 학생이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진학하는 대신 행상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돕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런 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또래들보다 1년 뒤에 입학을 했습니다. 학년 당 학생수는 20명 안팎이었는데, 종희는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고교에 진학한 종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공대에 진학하였으며, 졸업 후엔 기업체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현재 민주당 경기도 용인-수지지역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도 출마했더군요. 종희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요,그 과정에서 한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종희에게 처음 들은 얘깁니다만 그도 대학시절에 야학교사를 했더군요.과거 자신처럼 가정환경이 불우한 후배들을 몇 년간 가르쳤다고 합니다.그 얘기를 듣고 종희가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말하자면 선배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후배들에게 대신 되갚아준 셈입니다.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 모임에서는 ‘학생’ 자격이지만 그곳 모임에서는 ‘교사’ 자격이랍니다.
한동안 교류가 없어서 그간 종희가 걸어온 길을 일일이 다 알지는 못합니다만,현재 종희가 서 있는 좌표를 감안할 때 미루어 짐작은 갑니다.‘나’보다는 ‘남’, 나아가 ‘우리’를 위해 종희가 살아왔다고 생각이 됩니다.종희가 정계에 입문한 것도 그런 발로에서라고 여겨집니다.내년 총선에는 종희가 그 꿈을 꼭 이뤄 부디 뜻한 바를 펼치길 기원합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견디며 반듯하게 자라준 종희에게 감사합니다.
종희야! 장하구나! 정말 장하구나!
* 이 자리를 빌어 하나 밝혀둘 것은 저같은 사람보다도 4년 내내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 교사로 활동한 선후배 교사들, 특히 초창기에 군인들로부터 학교를 인수받아 학교 운영의 기틀을 다진 1, 2기 선배님들께 감사드리며, 또 모든 공을 돌립니다.
위 내용은 정운현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제직무렵 작성하신 글을 옮긴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