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신문을 통해 당대 저널리즘의 모습과 근현대사를 조명해보는 ‘옛날 신문 산책’을 연재한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구한말 대표적인 구국 항일지로 꼽힌다. 그 무렵 일본 고베에서 무역업을 하던 베델은 사업을 접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 자격으로 취재차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분개한 그는 양기탁 등의 도움을 받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항일지를 표방한<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낱낱이 고발했다. 사옥 입구에‘개와 일본인은 출입 금지’라는 간판을 내걸 정도로 기개가 높았다. 그러나 신문사가 베델 명의로 돼 있는 바람에 치외법권 지대여서 일본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우호적 관계였던 영국 정부에 항의했고, 결국 베델은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는데 임종 때 양기탁에게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유언했다.
'대한매일신보' 사고 (1910.8.30) [이미지=정운현 제공]
그러나 베델의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베델이 죽은 지 20일 뒤인 5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통감부에 매수돼 통감부 기관지가 됐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일본은 제호의 ‘대한’ 두 글자를 떼어내 <매일신보>로 개제(改題)한 후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이후 <매일신보>는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35년간 일제의 통치정책을 홍보하는 어용지 역할을 했다.
한일병탄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조인됐고, 8월 29일 순종이 조칙(詔勅)을 내리면서 발효됐다. 한일병탄 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상징인 ‘대한(大韓)’ 두 글자를 지워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8월 30일 자 칙령 318호에서 ‘韓國(한국)의 國號(국호)는 改(개)하여 爾今(이금) 朝鮮(조선)이라 칭함이라’며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고쳤다. 이날부로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같은 날 <대한매일신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국호 변경에 따라 名號(명호)와 社名(사명)에서 ‘大韓(대한)’ 2자를 刪去(산거)했다’고 알렸다. ‘산거’란 깎아서 없앤다는 뜻이다.
<대한매일신보>가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너도나도 뒤따랐다. 하루 뒤인 8월 31일부로 <대한신문>은 <한양신문>으로, <대한민보>는 <민보>로, <황성신문>은 <한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꿨다. ‘황성(皇城)’ 역시 한국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같은 조치는 당연히 총독부가 취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의 서대문과 동대문에는 ‘대한 도수장(屠獸場)’이라 불리는 도살장이 있었다. 9월 2일 자로 이 명칭에서 ‘대한’ 두 글자를 떼어내 각각 ‘서대문 도수장’, ‘동대문 도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1907년에 윤효정, 장지연 등이 조직한 국민계몽단체인 대한협회는 9월 4일부로 조선협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또 당시 물지게를 지고 물장사를 하던 사람들의 모임인 대한수상(水商)조합소는 경성(京城)수상조합소로 개칭했다.
책이라고 무사했을까. 9월 14일 경무총감부는 국내에 발행된 책 가운데 제목에 ‘대한’ 두 글자가 들어간 책은 모두 압수했다. 두 달 뒤인 11월 18일에는 시의(時宜)에 부적합한 서적들을 추가로 압수했는데 대상은 <대한역사(大韓歷史)> 등 51종이었다. 이때 우리 역사 서적이 대량으로 폐기 처분됐다.
대한제국이 1909년 10월에 설립한 한국은행도 화를 면치 못했다. 1910년 12월부터 개칭 논의가 시작되더니 이듬해 8월 15일 조선은행법이 시행되면서 조선은행으로 개칭됐다. 한국은행은 해방 후에야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1950년 5월 5일 법률 제138호로 한국은행법이 제정됐고,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 간판을 달고 창업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