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주 "정치 전면 나선 검찰…이건 거의 '무신 정권' 수준, 나라 망해갈 때나 있는 일"
국민의힘 이언주 전 의원이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최근까지 검찰 수사 정국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이것은 거의 무신 정권이다"라며 "망국의 길이다. 나라가 망해갈 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전 의원은 지난달 27일 KBS 라디오 <배종찬의 시사본부>에 출연해 "(탄핵 이후에) 정치 한폭판에 검찰 수사가 주인공이 돼 왔다. 물론 (박근혜, 이명박) 그분들이 잘못이 있고 이재명 대표도 뭔가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대한민국 정치에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서 몇년째 이러고 있느냐. 그사이에 대통령 두명을 감옥에 보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됐나. 증오만 남고 상처만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때 통합과 개혁의 리더십을 보였어야 하는데 그때 또 검찰가지고 적폐수사를 계속했고, 정권이 다시 바뀌었지만 또다시 검찰 수사가 정치 전면에서 계속되면서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이런 분들이 정치 전면에서 계속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분들이 내뱉는 말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며 "정말 망국의 길이다. 이것은 거의 무신정권이다. 이것은 나라가 망해갈 때 이런 일들이 생긴다"고 비판했다.
이 전 의원은 "국민들의 삶도, 안보도 위기다. 이제 여야가 어느 정도 선에서 휴전을 하고 대승적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특히 여당은 더이상 비난하고 화내고 구속에 또 집착하고 이러지 말고 정말 형님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과 관련해 "이재명 대표는 기사회생한 것이다. 2년 가까이 수사를 끌어왔지만 이 정도 선에서 수사는 마무리 수순으로 가고, 기소를 해서 재판으로 넘겨야 하지 않나. 아마 중도층은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이 전 의원은 "물론 국민의힘의 극렬 지지층은 속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적에 대해 사건을 후벼 파서 궤멸시키고, 거의 활극이잖나. 이렇게 해서 상대를 죽인들 그런 방식은 계속 보복을 통해 반복이 된다.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지지층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대 입장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국민의힘에 조언했다. 이 전 의원은 민주당에 대해서도 "과거 탄핵 직후 적페 청산 과정이 너무했었다. 그때 개혁과 통합으로 나가지 않고 상대를 궤멸시키는 쪽으로 갔다. 민주당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장관 책임론'에 대해 "안타깝게도 본인이 체포동의안 의결을 요청할 때 너무 많은 얘길 했고, 마치 본인이 수사를 책임진 사람처럼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한 장관이 이번 수사에 책임자처럼) 그렇게 인식이 되버렸다. 사실상 정무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 됐다"며 "법무부장관은 드라이하고 간단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차피 의원들은 (표결을 할 때) 이미 (혐의 등을) 알고 온다. 너무 감정을 실어 말하고 마치 자기가 수사한 담당검사처럼 얘기했다. 결과에 대한 정무적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의원은 "이번 법원 결정을 보면 위증교사를 제외하곤 소명이 안됐다. 그 난리를 쳤는데 둘 중에 하나다. 실제 수사한 결과물에 비해 너무 국민들에게 과장되게 블러핑을 했거나, 아니면 수사 자체가 제대로 실력이 없었거나"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 [民主主義]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를 말하고,
◎전체주의 [全體主義]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정부나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정치사상 및 정치 체제 말한다.
무신정권.
1. 무신정권(武臣政權)은 고려시대 중기에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던 시기와 그 당시의 정권을 일컫는 말이다.
1170년, 무신들이 문신에 비해 자신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현원에서무신정변을 일으켰고, 기존의 고려를 지탱해온 문신들과 지배계층을 학살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한 뒤 명종을 옹립했고 정권을 차지했다. 이후 숙청을 일으킨 무신들의 일가족과 친목파벌들이 돌아가면서 100년의 기간(1170년 ~ 1270년) 동안 고려를 통치하게 된다.
2. 성립과 소멸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당연히 무신정권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지 한참 이후에야, 고려 말기의 각종 인재와 영웅들이 마구 출현한다. 즉 고려는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는 국가였으나, 무신정권이 새로운 고인 물이 되어서 100년 동안 열심히 고려의 인재 출현을 막았던 셈이다. 본인들이 문신들의 차별 때문에 국가를 점령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기존의 문신들보다 더욱 원칙 없고 지독하게 친목질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앞뒤 논리도 안 맞는 옹졸한 방식이었다.
무신정권은 기존의 쿠데타 정권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마피아처럼 권력을 돌려먹기 및 권력 쟁탈을 여러 차례 하면서 군주는 명목상의 국가수반이 되어 필요에 따라 교체와 임명이 되었다.
대대로 세습하는 60년 최 씨 정권까지 가면 최 씨 가문의 중방으로 변질했다.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최 씨 막부(崔氏幕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사의 친숙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빗대는 것에 가깝다.
결국 무신정권에 끼지 못한 지방 군인들도 국가를 나눠 먹겠다며, 무신정권처럼 군사력을 사유화하면서 이로 인해 무신정권과 똑같은 형식으로 반란이 잦게 되었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중앙의 정치 깡패 집단에 불과했으므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의 한계가 있으니 귀찮으면 지방 통치를 방관했다. 한마디로, 십상시와 세도정치의 더욱 무능했던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존의 문신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친목질 때문에, 본인들의 파벌에 끼지 못하는 인재들에게는 권력을 나눠주지 않고 군인끼리 차별하는 경향도 더욱더 강했다. 이로 인해 명색이 무신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군들과 지방군들의 내전이라 볼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였다. 무신정변 이후 모든 관직과 이권을 중앙군들 특히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들만 나눠먹은 결과로 인해 벌어진 사태였다.
무신정권은 초기에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하고 거기에 가담한 중앙군들만이 특혜와 이권을 누리다가 무신정권이 이후 최 씨 가문의 독재로 변질되면서 중앙군들마저 이런 특혜와 이권에서 배제당하고 최 씨 가문의 사병들인 도방과 삼별초들만이 그것도 최 씨 가문의 집권자들과 그들과 가까운 일부 장교들만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는 폐쇄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다.
결국 도방과 삼별초마저도 폐쇄적으로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도방과 삼별초 집단들 중 이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 집단들은 최 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동원되어서 최 씨 가문을 멸문지화 시켰다.
집권 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그리고 최충헌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 들었고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60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과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연이어 정권을 잡았다. 크게 최충헌까지의 전반부와 최충헌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고려사에서는 무신정권 집권자 중 경대승만 열전에 실려있고, 나머지는 전부 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혼자 집권 못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몽골과의 전쟁 끝에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고려의 군주 원종이 원을 등에 업고 친몽주의적인 정책으로 이들을 압박 및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원종에게 밀명을 받은 배신자 무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개경(개경 환도)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치하에서는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그때부터는 원 간섭기였다.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했지만 관군과 몽골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였고 결국 무신정권은 사라졌다. 다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일부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 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 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2세기~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3. 특징
3.1. 무너지는 국가 체제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삼두 시기 - 이의방 - 정중부까지는 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는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의 권한이 무신정변으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뒷날 이고가 이의방에게 죽으면서 삼두 균형이 깨져도 중방의 권한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나름 균형을 지켰다.
하지만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살해되고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중방을 무력화시키면서 무신 정권 집정자의 견제 세력이 사라졌고,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 대에 이르러선 아예 독재정권이 되어 아들부터 증손자까지 권력 세습까지 된다. 기존의 엘리트층을 전멸시키고 새로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전임자를 대체할 능력도 의지도 부재한 이들이었고, 결과적으로 고려의 국정은 파탄지경에 이르고 만다.
무신 정권은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다. 무신정변의 주동자들은 중앙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까지는 문제없이 해치웠지만 정작 그 권력을 사용해 어떤 고려를 만들지에 대한 비전은 전혀 없었다. 귀족정치 시절의 문제점을 일소하고 민생을 활성화하는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정치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들의 이익을 합법적으로 보장할 이기적인 정치구조조차 새로 만들지 않았고, 단지 기존의 정치구조에서 윗자리에 올라타면 자신들이 문제없이 문벌 고관들의 권력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즉 지배층 내부의 권력 배분에 있어서 제도와 정치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것이다. 이들은 왕을 겁박해 조정의 온갖 높은 관작을 자기 이름 앞에 덕지덕지 붙여놓았지만, 정작 그 관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세련되게 합법화할 방법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관직은 자신들의 권력에 붙일 이름표였을 뿐, 관직이 부여하는 권력의 정치적 역할과 그것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몰이해했던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인들끼리 국가권력을 나눠먹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어떻게 나눠먹을지에 대한 합의도 전혀 없었다. 정권 장악 후 손에 넣은 권력을 어떻게 배분할지, 내부 서열은 어떻게 정할지, 각자의 이권을 견제하거나 동맹을 공고히 하는 수단은 무엇으로 둘지 등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기 때문에, 문벌귀족을 칼로 죽이고 그들의 파이를 빼앗자마자 자기들끼리 파이를 더 많이 떼어먹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변이 일어난 지 달랑 몇 달 만에 소위 '조정 대신'이자 '정변의 일등공신'이라는 이고와 이의방이 맞싸움을 벌이다 이고가 베여 죽은 사건은 정변의 주동자들 간에 권력 분배에 대한 공인된 합의가 전혀 없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명색 국가 대신들 간의 권력 투쟁이 정치제도 하에서의 정쟁(政爭)이 아니라 살육전으로 판가름 난 것만 봐도, 결국 무신들 사이에서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명분이나 관직이 아니라 대신 개개인이 소유한 폭력의 규모와 망설임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무자비함이었던 것이다.
정중부를 역시 사병으로 암살한 경대승은 심지어 관직 하나 없이 자기 집에 머물면서도 도방이라는 사병 조직을 이용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조정 관직을 권력의 이름표 역할조차 제대로 못 하는 껍데기로 전락시켰다.
그러니 무신들은 기껏 손에 넣은 합법적 관직을 탈법적인 힘(사병과 부정축재)의 크기를 키우는 수단으로만 사용했고, 자신의 권력을 제도 내에서 정당화시키기보다 상대보다 더 큰 폭력 집단을 구축해 상대를 선제공격하는 데만 골몰했다.
이는 중앙권력이 붕괴하고 국가가 사분오열되어 군벌들이 발호한 아노미 상태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인데, 이들은 일단 제도 자체는 멀쩡한 중앙조정 안에서 원시적 군웅할거를 지속했다. 좋게 말해 군웅할거지 이는 숫제 깡패의 논리로,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조폭 파벌 화한 무신들이 사병들의 쪽수를 통해 고려의 이권을 얼마만큼 나눠먹을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했던 것이 무신정권 초기 정권의 실태다. 이는 최 씨 일가의 확실한 집권이 이루어져서 국가 체제가 안정되고, 군인들이 문신으로 바뀌고 권력이 평준화되기 이전까지 반복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칼 휘두르고 으름장을 놓아서 자기 뜻을 따르게 만드는 조폭식 해결법이, 먼 고대 부족국가라면 몰라도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는 중세국가인 고려를 효율적으로 커버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관료제와 율령제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조폭이나 부족국가 수준의 정치능력을 보여준 무신정권은 그 권력의 확장에 필연적인 한계를 보였다. 끽해야 개경 내 친위 쿠데타로 권력 위에 올라탄 이들이 아무리 윽박지르고 향락을 공유해 봤자 고려 전체의 백성과 세력을 사유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깡패의 논리로 보면, 자신이 사유화할 수 없는 병력은 결국 남의 군사 거나, 어차피 남의 군사가 될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들 개인의 차원에서는 없느니만 못했다.
다른 쪽의 쪽수가 불어나고 고려의 전체적인 국력이 예전처럼 강성해지며 통합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인재와 경쟁자들의 군사력 증가였고, 본인들이 그랬듯이 하룻밤만에 기습을 당해서 정부가 뒤집혀도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신 권력자들은 자신이 직접 손에 쥘 수 없는 군사력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견제했고, 이는 국가 전체 국방력의 허약화를 가져왔다. 군사 동원력과 행정력이 이전 대 거란 전쟁 시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 것은 물론, 있는 군사들조차 유력자들이 각자 자기 보신을 위해 최대한 자기 곁에 잡아두려고 혈안이었기에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도는 극히 낮으면서 이익과 권력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단 무신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의종을 폐위시키면서 벌어졌고 그밖에 명종, 희종, 원종 등이 무인 집권자들에 의해 폐위당한 바 있다.
이렇게 집권자에 오른 군인 출신 두목들의 입맛에 안 맞다 싶으면 군주도 마음대로 폐위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극히 낮았지만, 이의민을 제외한 무신들은 실권자에서 만족하고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는 무신정권의 군사력이 수백 명 ~ 1천 명 단위로 전체 군사력과 비교해 매우 작은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신정권은 정부를 점령하는데만 필요한 군사력으로 문신들이 만들어놓은 체제를 하위호환으로 대물림하며 향락을 즐겼을 뿐이다.
한편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이익과 신변에 위협이 간다면 국가가 망하든 말든 모든 문제와 책임을 회피하고 숨는 작태도 서슴지 않았다. 최씨 정권은 당시 12C 중반,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 제국의 군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항전할 생각도 혹은 협상을 할 생각도 않고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전도 항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약 30여 년 동안 질질 시간을 끌었으며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항복만 번복하며 몽골을 기만하여 외교까지 막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몽골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몽골이 침략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몽골군이 내륙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하든 말든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명목상이나마 국왕이라면 대국에 항복해도 동아시아 전통의 책봉-조공 체제하에 편입되어[8] 제후국 군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무신과 같이 단순한 실권자에 불과하다면 대국에 항복했을 때 보장받을 수 있는 지위가 없다. 실제로 몽골에 항복하고 얼마 못 가 무신정권이 붕괴됐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국정에는 큰 자질이 없는 자들이 기존의 문벌귀족들이 가졌던 부패를 더욱 저열하게 물려받았기 때문에, 국가를 쇠퇴시킨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의 군인들은 태반이 천민이나 까막눈이었다.덕분에 고위 군인조차 국가통치에 대한 지식 따윈 담쌓고, 본인의 이름만 겨우 쓸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다 보니 무신정권부터 고려는 겉모습으로서만 남게 되었고, 국내외에 잘 알려진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허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3.2. 군사력의 정치화
무신정권은 군사력을 정치화시켜 몽골의 침략을 방관하고, 고려의 지방군대를 해체하여 침략의 자동문을 열어주면서 수시로 고려의 크고 작은 마을과 모든 목조건축을 불타서 사라지고 백성들이 유린당하는 지옥 같은 시대상에 기여를 했다.
무신정권의 군인들은 원래의 본분인 외적들과의 싸움을 극도로 꺼렸고, 정치판에서 무신의 기반이 되는 각지의 군인을 정치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향락과 수탈을 국가 운영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무신정권의 군사력은 국가 전체를 정복할 규모가 아니었기에, 각지의 군인들도 중앙정부를 고깝게 보고 각자의 정치깡패 파벌의 단위로 나뉘어 국력을 사유화했다.
그 결과 당연히 국가 전체의 방위력은 크게 쇠퇴했다. 특히, 무신정권은 본인들의 친목질 마피아에 끼지못한 지방군대를 견제했고, 심지어는 지방 군대를 해체했다. 다른 군인들과 인재들이 본인들이 저질렀던 무신정변처럼 하룻밤만에 정권을 뒤엎어버리더라도, 무신정권에는 아무런 명분과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신정권만이 고려에서 가장 크고 유일한 군사세력으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본인들의 친목라인이 아닌 종류의 군사력은 국가 전체적으로는 약화된 상태에 머무르도록 견제해야만 했다.
또한, 무신정권의 유력자들은 군인이었으니 자신들의 병졸들을 최고의 인력으로 채웠지만, 이들은 국가 전체를 지키기 위한 대규모 군사력이 아니라 유력자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사병들이며 수백명을 넘기기 힘든 정치깡패 혹은 마피아일 뿐이었다.
그래서 고려왕조가 10만단위의 병력을 주구장창 무장시키고 지휘하며 싸우던 강력했던 시대는 무신정권이 아니라, 국가행정과 군사전략을 모두 다룰 수 있는 기존의 엘리트층인 왕실과 문벌귀족. 그리고 뒤이어 신진사대부가 집권했던, 무신정권을 제외한 전후의 시대들이다.
특히, 대규모 군단 육성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제대로 운영하고도 장기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무신정권의 군사력 규모는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국가를 위해 엄청난 지출을 할만한 애국자들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대규모 군단을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경영능력도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국가 전체의 군사력 증강을 다른 지방의 경쟁자를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멀쩡히 잘 돌아가던 지방군을 해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무신정권은 중앙의 군인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빼돌리고 사유화하여 조폭으로 만들고, 서로 국가의 이권을 땅따먹기 식으로 해체하여 나눠먹는, 정치와 군사 모두의 약화를 가져왔다. 즉, 군사력을 정치화 하는 결과물은, 모든 국력이 약화된다는 비정상적인 국가 체제의 모든 단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무신정권은 군인정권임에도 고려왕조에서 군사적으로는 가장 허약했던 지배세력이었다. 무신정권에도 어느 정도 사병은 있었지만, 경대승의 도방에서 보듯이 초창기에 직접 조종하는 사병은 고작 1백명 남짓이었고, 그런 경대승을 이의민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보면 다른 인물들도 경대승보다 군사력이나 능력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신정권의 전성기의 최씨 정권의 사병조차도 많아봐야 '천명' 정도다. 물론 친위세력인 삼별초의 규모가 상당하긴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정권의 친위대였고, 사실상 유일한 국가 군대임에도 정치 마피아가 되어버린 무신들의 생명줄이었기에 국가를 위해서 쓰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대기해야 했다.
4. 평가
무신정권은 군사적으로는 군사를 정치화하여서, 유일한 정규 군사세력 삼별초와 군인들을 국가가 아닌 본인들의 안위만 지키는 친위대로서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는 고려 왕실을 혈통자판기 정도로 우습게 만들었다. 이후의 집권세력들인 권문세족들도 무능하고 부패한터라 무신정권이 망쳐놓은 고려의 군사력, 정치구조를 이용해서 고려를 갖고 놀았다. 그래서 무신정권 이후에도 고려의 강건함은 멸망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무신정권은 기존에 고려를 이끌었던 엘리트층을 사실상 몰락시켰다. 그 덕분에 계급제가 초기화되고, 정계진출이 막힌 문벌귀족들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변화가 생겼으나, 그러한 일을 해낸 것도 집권한 무신들보다는 실무역할을 맡은 문신과 귀족 출신들이 주도를 했던 편이었다.
즉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영향력은 단순히 군인 친목 향우회의 이권 문제를 위해서 일어난 죄질이 깊은 개적이 직접적인 결과물들이었으며, 무신정권이 고려를 위한 긍정적인 의도에서 벌인 활동은 집권기인 100년 동안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본인들의 사유물로 전락한 중앙의 병력을 제외하면 각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몽골 제국의 침략을 간접적으로 돕는 악영향을 낳는다.
무신정권 시대는 중앙부터 각 지방의 군인들이 그 지역의 군벌로 난립하며 군사력을 사유화하고 민중을 수탈하며 반란이 자주 벌어졌다. 이는 군인들의 본분인 국가방위가 중앙(권력)과 멀어지는 3D업종에 불과해졌을 뿐더러, 각 지역의 군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호감을 사는 잔치와 로비를 일삼는 것이 새로운 성공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중앙에서부터 그러한 풍조로 권력을 잡고 유지했고, 이러한 흐름은 최씨 세습정권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통제를 하려고 해도 반복되었으며, 그리고 최씨집권기, 정권 붕괴 이후의 잔당들에 이르기까지도, 군인들끼리의 친목질과 향락으로 각지의 군사력을 각 파벌에서 영입하며 권력을 돌려먹는 친목질은 무신정권의 군인정치가 보인 근본적인 성질이었다.
조폭정치에 불과했던 초기 무신정권에서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가면서, 무신들도 결국 문신처럼 바뀌고 국가 전체를 위한 합리주의에 의해 쇠퇴한다. 또한, 고려의 계급제도가 한번 리셋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도 군인들의 친목질이 해소되고 상식적인 문신과 행정관료 위주의 정부로 돌아가면서 효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주요 사건으로는 몽골의 침입, 문인들의 정계진출이 막혔을 때 주체적인 문화의 발전, 토지제도와 등용제의 정비 같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신경을 쓴 것은 본인들의 이권문제 뿐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조선왕조에서는 무신정권을 반역집단으로 취급했고, 조선에서 펴낸 고려사에서도 경대승을 제외한 모든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무신정권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체제에서 무신정권이 정당한 무인들의 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보는 위인전 모음집에 최충헌 편이 버젓이 발간될 정도였으며 최씨 정권에 대해서도 단점이나 악영향을 숨기고 고려를 안정시켰다든지 삼별초까지 대몽항쟁의 영웅으로서 미화했었다. 물론 이는 독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 없어진다.
4.1. 이성계와의 비교
무신정권은 후대에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이성계와 자주 비교되고는 했다.특히 최씨 정권은 군주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4대에 걸쳐 집권할 정도로 이성계만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양자를 비교하면서 왜 무신정권은 이성계처럼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고 집권기간도 더 길었던 사람이 많은데도이성계처럼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창건하지 못했는지 논의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군인 마피아 집단에 불과했고, 그 점에서 한국사 명장 중 하나인 이성계와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무신정권은 견제세력이 없는 100년 동안 국가 운영에 대한 비전 없이 행패만 일삼아 국가를 퇴보시켰지만, 이성계는 고작 4년만에 국가를 통합하고 낡은 고려를 대신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여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이성계의 시대는 무신정권이 쉽사리 학살한 문신들과는 달리 매우 강성한 라이벌인 최영과 권문세족들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무신정권은 군사적으로도 무능했으나, 이성계는 나라의 수호자로 평가받던 명장이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별다른 기반 없이 중앙을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만 있었지, 이성계와 같이 외적을 자기 사병으로 토벌할 정도의 압도적인 군사적인 능력은 없었다. 무신정권의 핵심 친위대도 딱 수도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깡패 수준에 불과했다. 최충헌은 이 점을 염려했는지 집권한 뒤에 고향 진주에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었고 그 덕에 최씨 정권이 4대나 간 것이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이라는 변수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이성계는 고려 말기에 순수한 사병으로만 2천여명을 이끌고 다니며 외적들을 만날 때마다 박살내버렸고 이는 중국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만큼 의문의 여지도 없다. 사실 이성계의 가별초도 그들만의 특수성[15]을 제외하고 규모로만 따지면 이성계와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춘 라이벌이 상당수 있었다. 심지어 고려 말기는 별 세력도 없었던 문신 조반이 염흥방의 노비에게 받은 수모를 복수하려고 "수십 기"의 병사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무신정권은 단순히 수도권에 숨어살면서 연명했던 정치조폭 이권집단이었으므로, 근본적으로 매우 허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당성을 얻을만큼 외적을 수없이 격퇴하면서 얻은 높은 명성도 있었고 정도전과 남은, 윤소종, 조준 같이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유능한 문신"들도 있었지만, 무신정권은 입지를 공고하게 할 훌륭한 공로도 없었고,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능력을 지닌 조력자도 없었다.
무신정권에서 그나마 좀 깨어있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경대승 또한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말고는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이 복귀 정책도 당시 무신정변 덕분에 군주 자리에 오른거나 마찬가지인 명종에게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4.2. 일본 막부 체제와의 비교
무신정권은 무인들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체제라는 점에서 일본의 막부(바쿠후)와 종종 비교된다. 공교롭게도 당대 일본 역시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 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체제는 교토의 덴노가 여전히 군주로 군림하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조정과 관직, 특히 제사와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기능은 그대로 두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막부라는 정부를 따로 만들어서 국가를 운영했다.
무신정권은 비록 국왕의 행사를 대리 하며 국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두었다는 점은 일본과 같았을지라도 가마쿠라 막부 처럼 정부 자체를 이원화를 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비슷한 형태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덴노가 교체되는 무로마치 막부 부터라 할 수 있다.
그 외 한국의 무신정권과 굳이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가마쿠라 막부 이전에 세워진 헤이케의 로쿠하라 정권이 있다. 로쿠하라 정권 역시 무사 출신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중앙권력을 장악해 수도 교토에 머무르며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 헤이케가 바다에 접한 항구도시 후쿠하라로 수도를 천도하려 한 것과, 고려의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비자발적인 행동이지만) 바다에 접하고 있는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했던 것 역시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로쿠하라 정권은 겐페이 합전에서 패배하여 지방세력이었던 미나모토 세력에게 무너졌고, 미나모토는 조정을 장악하는 대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했다. 따라서 일본은 기존의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지방에 전혀 다른 형태의 무신정권(막부)로 교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한국에도 조위총의 난이라는 지방세력이 중앙의 무신정권에 도전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진압됐고 무신정권은 계속 이어진다. 이후로도 일본은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는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한국사에서는 최후의 전제군주국가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 까지 비슷한 무신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꾸준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가 되고 있는 로쿠하라 정권과는 다르게 무신정권은 역사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괴담만 나오는 상황이라, 무신정권과 로쿠하라 정권 간의 비교는 엄밀히 따지자면 로쿠하라 정권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 천도 건만 봐도 로쿠하라 정권이 새로운 수도로 삼으려 했던 후쿠하라는 현대의 고베시이며, 교역에 유리한 후쿠하라를 기반으로 하여 한반도와 중국 국가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겠다는 비전이 보이는 결정이었다.
물론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과 준비 부족으로 인해 얼마 못 가 교토로 복귀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몽골의 침입으로 도망치듯 강화도로 천도한 뒤 백성들이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동안 놀기만 했던 최우를 위시한 무신정권의 지배층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애초에 로쿠하라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 만한 인물이 무신정권 집권자들 중에는 없었다. 별 정치적 역량이 없는 무장들끼리 권력다툼만 했는데도 무신정권이 100년을 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약 타이라노 키요모리나 후대의 이성계 정도 되는 인물이 이 때 있었다면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거나, 막부 형태의 이원화된 정치 체제가 장기간 존속했을지도 모르겠다.
5. 집권자 및 기간
6. 무신정권기의 수많은 반란 ...... (아래) 무신정권--나무위키--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