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에 가타부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릇되었다고 따지기 전에 홍범도 장군의 일생을 기록한 백과를 살피고 당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의 실정과 국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판단하시길 바란다.
다만, 일본제국 통치 36년 그 당시 소련 공산주의체제와 1950년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공산주의 사상을 동일시 바라보는 시각은 자칫 역사를 왜곡하는 성향이 빠질수 있으므로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홍범도 장군의 항일 투쟁 정신과 북한 김일성의 우상화 주체사상은 확실히 다르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져볼 이유조차 없다 할 것이므로 이만 가름한다.
다음은 포털-싸이트 ---백과에 게시된 내용을 ..... 옮긴 것이다.
1.생애
항일 활동
1895년, 을미의병 직후 일본 제국이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을 발령하자, 강원도 회양군에서 김수협 등 14명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했다.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이동해,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했다.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를 했다. 김수협 및 여러 의병이 죽고 도주하는 등 기세가 사그라들자 의병을 해체했다.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노동자가 되었지만 일본군의 감시가 끊이지 않자 함경도로 향했다.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정을 빼앗고, 함경도 덕원읍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해 금품을 빼앗고 1897년 함경도 북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죽은줄 알았던 아내 이씨와 자식을 5년만에 재회했다.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 및 화전농으로 생계를 이었다. 또 다시 포수 권익 단체('포연대(捕捐隊)')의 대장이 되었다.
1907년,
정미의병 직후 일본 제국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으로 총기를 수거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등과 포수 70명과 '산포대'라는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 헌병 및 일본 육군과 크고 작은 37회 전투를 벌였다. 함경도 북청의 후치령에선 적군 2명과 순사 1명을 사살하고,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군경 70명과 3시간 격전하여 30여명을 살상했다.
500~700명까지 의병이 늘어, 강원도~함경도의 삼수, 갑산, 혜산, 풍산 등에서 유격전으로 수비대를 격파했다. 산 속에서 먼 거리를 신속히 이동했기에 '나는(Flying)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8년
4월, 아내 이씨가 고문으로 옥사한다. 남편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협박에 "계집이나 사내, 영웅호걸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일본 제국이 장남 홍양순을 시켜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게 어떠냐"고 전했다. 이에 홍범도가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 장남 홍양순 역시 설득되어 의병에 합류하고, 6월 16일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21]
10월, 동지 3명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근거지를 옮기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차남 홍용환도 아버지와 연해주로 이주해 의병 활동을 했으나 결핵으로 병사했다.
1909년 6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이를 들은 (을미의병 시기 친해진) 유인석이 '역량을 키우라'는 격려/권고 편지를 보냈다.
2. 독립 운동
1910년 8월, 대한민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길림성의 백두산 인근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소련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1919년,
(앞서 1914년에 만들어진) '간도국민회'가 3.1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10월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1920년
3월, 간도국민회가 홍범도 산하 200여명을 국민회 직할 '정일제일군'으로 명명했다.
5월, 최진동/이태범의 300여명이 더해지자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했다. 최진동(사령관), 안무(부관), 홍범도(연대장), 중대장 4인 순으로 조직을 편성했다.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렀다.
10월, 청산리 전투를 치렀다.
3. 소련 합류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며, 곧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1921년 3월,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어주었다.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
1922년 2월,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 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 극동과 일본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사할린 부대에 소속됐던 김창수와 김오남이 홍범도의 암살을 시도하며 불시에 공격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해당 사건의 현실에 대한 설명은 아래 독립군 학살 누명 문단이 자세하다.
3. 말년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26]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 SSR로 이주되었다.
이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다.
1달 수입이 130 루블이면 당시의 평균 임금보다 꽤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홍범도에게 생활비 챙겨 주려고 일부러 마련한 자리라 편했기에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기준 소련 1루블은 약 0.8달러에 해당하였고, 이는 당시 미국의 비숙련 중졸 노동자가 200시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한다.
당시의 크슬오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 하바롭쓰크출판사 조선부 등의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홍범도와 자주 교류했던 소설가 김기철에 의하면 이러한 크슬오르다의 생활환경이 홍범도의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인예술가 전창화에 의하면 자원입대를 거절당한 홍범도는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을 불러모은 뒤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동전을 총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 / Üştöbe)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독립군들은 교전 중 사살당하거나 투옥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젊었을 때 사망한 경우가 많다. 홍범도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한 명인 김경천은 홍범도가 죽기 1년 전인 1942년 1월 2일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알려졌다고 쓴 이유는 김경천 항목 참조.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여운형, 김립, 김구[28] 등 백색테러에 희생당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 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의 고생을 겪으면서 천수를 누리지 못 해 죽고 말았는데 홍범도는 보기 드물게 노환으로 죽은 케이스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쓴 입국신고서에서 소원을 묻는 질문에 "고려 독립"이라고 쓸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그가 결국 전쟁의 종식과 광복을 보지 못했으니 어떤 심경으로 눈을 감았을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4.사후
봉환 과정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당시의 대한민국 대통령(권한대행)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범도의 유해 송환을 추진한 것은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대해 홍범도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에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 공사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하였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가운데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소련파 항목 참조).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마냥 북한에 우호적인 게 아니라는 것.[
거기에 소련이나 친소 성향 위성국들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당시 중립을 지향한 것 때문에 북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진행하면서 고려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쳤는데 북한이 2015년 말 카자흐스탄 수도에 대사관을 개설하겠다고 했으나 2016년 4차 핵실험으로 불허당하고 2017년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이 규탄하면서 카자흐스탄은 북한과의 거의 모든 관계를 동결시켰다. #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남한도 카자흐스탄에 정부 조사단을 보내 묘소 조사와 함께 유해 송환을 협의했는데 북한은 1995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 봉환은 (남측의) 사기 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봉환 계획은 쑥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97년 5월 한국 국가보훈처와 기업은 홍 장군 묘역 정비 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 묘역을 단장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태생에 아들 김두한, 손녀 김을동 등 가족이 남한에 있었던 김좌진과는 달리 홍범도는 태생이 평양 출생이었던지라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데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이 크즐오르다 묘역을 존치시키자고 해서 유지되었다. #
홍범도의 묘지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있었고 스탈린 사후 소수민족 탄압이 중지되면서 업적을 인정받고 복권되어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도 생겼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묘소를 매우 정성껏 관리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묘지 관리 상태가 매우 우수했다.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도 고려인의 입장을 들어 유해를 대한민국에 봉환하지 말고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존치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유해를 봉환하면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을 위해서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 정부가 추모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