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하던 부모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배호를 낳았다. 광복군 출신의 아버지 배국민과 어머니 김금순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가수 배호는 해방 후 입국하여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성장했다. 1955년 부친의 사망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모자원에서 생활하였다.
삼성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1956년 상경하여 외삼촌 김광빈의 수하에서 대중음악을 시작하여 김광빈악단의 드럼 주자로 미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했다.
1964년에 「두메산골」, 「굿바이」로 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67년 신장염 발병으로 병상에서 노래한 「돌아가는 삼각지」가 히트하여 톱 가수 반열에 올랐다.
배호는 「누가 울어」, 「안개 낀 장충단공원」「돌아가는 삼각지」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1967년 방송사들이 수여하는 가수상을 휩쓸었다. 이로부터 타계 때까지 쉬지 않고 300여곡이 넘는신곡을 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심지어 휠체어에 의지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부른 초기의 대표곡은「두메산골」이 트로트일 뿐,「굿바이」,「차디찬 키스」등 초기의 작품은 재즈나 라틴음악 등이 섞인 스탠더드 팝 계열의 작품이었다. 1971년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남기고 향년 29세에 타계했다.
그가 부른 초기의 대표곡은 「두메산골」이 트로트일 뿐, 「굿바이」, 「차디찬 키스」 등 초기의 작품은 재즈나 라틴음악 등이 섞인 스탠더드 팝 계열의 작품이었다.
배호의 가창은 일반 트로트 가수들과 달리, 스탠더드 팝의 남자가수들이 보여준 중후한 저음을 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강조하고 절정부에서 애절한 고음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1960년대식의 새로운 남성 트로트 창법이다.
그는 인기 절정이던 29세에 타계함으로써 요절 가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음반 업계는 배호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를 발굴하고자 하였다.
1967년 《청춘을 돌려다오》를 발표한 가수 신행일이 배호 목소리와 가장 흡사하다는 정평이 남에 따라 가수 신행일이 배호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다. 현재 신행일은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행일 이사장은 대중가요는 작품성이 좋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수는 착하고행실이 바른 인성 (人性)이라야 한다. 어수선한 대중가요계에 본이 될 만한 후배를 꼽는다면 "그곳에 가고 싶다" "들녁의 바람" "안반데기" 등 다양한 곡을 작사/작곡한 가수 우정덕을 떠올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래는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이사장 신행일이 부른 - 배호 노래 "굿 바이". 안개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돌아가는 삼각지, 한 번 들어보시라, 들어보면 굿~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