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학창 시절 서울로 유학하였다. 중학생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는지 당시 종로에 있던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휘문고 등 명문고에는 낙방하고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에 진학, 졸업하였다.
1971년 동성고 졸업 후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 1975년 졸업하였다. 서울대 졸업 후 고려대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하여 1978년 수료하였다.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수원지방검찰청에 있을 때,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의 주임검사로서 수사를 지휘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강력 및 특수 검사로
조폭들을 소탕했다.
2001년 6월,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목포에서 향판 출신 변호사로 유명한 아버지 박창택과 DJ 정권의 실세인 목포 출신
박지원과의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2년 2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정권의 지원을 받아 요직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의제였던 재벌개혁을 앞장서서 진두 지휘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서울지검 2차장에 임명되었고 1년만인 2003년 3월 서울중앙지검 제2차장이 되었다. 이시절
SK그룹 글로벌
분식회계 사태 수사를 지휘하여
최태원 회장을 수사하여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4년 6월 서울고등검찰청 차장이 되더니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2005년 4월 검찰의 꽃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대검 중수부장)에 임명되었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인 2006년에는 현대자동차그룹 비자금 수사를 지휘하여
정몽구 회장을 구속 기소하면서 다시 한번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이후 노무현 정권 말기에도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2007년 4월 대전고검장이 되었고, 반년만인 2007년 11월 검찰의 핵심 요직인 서울고검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면서 과잉수사의 책임을 지고
임채진 검찰총장이 사직하고 후배인
김준규가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관례에 따라 퇴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수는 퇴임사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였던 자신이 이명박 정부의 압박에 의해 퇴진한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2009년 1월 1일자 한겨레. 이는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민주당 지지자들이 인터넷상에서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는 등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다. 이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과 맞물려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친노 세력들이 화력을 모아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며 재결집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검사 퇴임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측근이 연루되었던
박연차 게이트 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변호인을 담당했다. 이에 친노 세력과 민주당의 비호를, 한나라당의 견제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0% 미만의 저조한 지지율로 퇴임한 직후라, 이해찬, 유시민 등 과거 친노 핵심들조차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노무현을 직간접 비판하는 등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시전하며 독자 생존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수가 박연차 게이트의 변호를 맡자 친노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시전하던 정치인들이 노무현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며 다시 결집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
2013년 2월,
지방자치단체 세금 낭비 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서울특별시
세빛둥둥섬 사업과 관련하여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 등 12명을
대한민국 검찰청에 수사 의뢰, 7000여억 원이 투입된
용인경전철 사업에 대해 주민감사를 청구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은 오세훈 전 시장의 혐의에 대해 맹비난을 쏟아냈고 오세훈 전 시장은 비리 정치인으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2015년 2월 법원은 오세훈 전 시장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2013년 2월 25일,
우리금융지주 이사회에서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
#2014년 3월 24일,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2014년 11월 3일, 기존에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 이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두 이사회가 통합하게 되었고, 박영수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이 새로 통합된 우리은행 통합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2014년 11월, 제48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2015년 2월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훗날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핵심 인물들이 박영수의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를 계기로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남욱, 조현성 변호사 등이 당시 박영수 캠프 멤버였다고 보도되었다. 남욱, 조현성 변호사는 이전에 박영수와 한 법무법인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또
김만배 전 기자도 이때 박영수 캠프의 선거를 도왔다고 한다.
# 대장동 비자금이 박영수 선거 자금으로 쓰였다는 기사도 나왔다.
#2015년 6월 10일 열린
황교안의 국회 인사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온 박영수는 "황 후보자는 소신형으로 본인의 소신이 뚜렷하면서도 지나치게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 (검찰) 조직 내에서 상하 간 신망이 두터웠다"라고 밝혔다. 이어 "황 후보자는 또 업무에 있어 꼼꼼하고 언행이 무겁고 신중했다"라며 "또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구나 일을 맡기고 싶어 했사람"이라고 추켜올렸다.
# 박영수는 황 후보자와 인연에 대해 "검찰에 30년 가까이 있으면서 저랑 가장 많이 근무했고 가까운 사이"라며 "부산 동부지청장 재직 시, 또 서울 고검 차장 검사 시절 함께 일했다"라고 밝혔다.
박영수는 또 황 후보자가 검찰에서 퇴직한 후 "법무법인 태평양에 근무하도록 소개했다"는 점도 공개했다. 박영수는 "황 후보자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매사에 주어진 현안에 대해 끝까지 진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라며 "황 후보가 색소폰 연주를 하는데 사실 부산 동부지청장 시절 제 권유로 배우기 시작했다, 저는 아직도 잘 못하는데 황 후보자는 (실력이 대단하다)"라고 설명했다.
# 김제식 새누리당 의원이 '황 후보자가 국무총리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느냐'라고 묻자, 박영수는 "황 후보자가 주로 법무 분야에 근무해서 경제·국방 분야에서 전문성은 약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평소 노력하는 모습,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 부처 장관과 국회와 두루 협력하면서 부드럽게 업무를 수행할 적합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2015년 6월 17일 자정 무렵에 사무실에서 퇴근하던 도중 서울 도심의 길거리에서 과거 소송결과에 불만을 품은 상대편 당사자에 의해 흉기로 습격을 당했다.
# 문제의 인물은 결국 살인미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30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로 임명되었다.